티스토리 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금성(紫禁城)이 바로 이곳이다. 원·명·청으로 이어지는 800여 년간,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천자의 거성(巨城)이며 청대까지 중국 정치의 1번지.
동서 753m, 남북 961m, 총면적 72만㎡. 천안문 광장의 약 1.7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지금의 자금성이 세워진 것은 명대인 1420년,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이 일대에 궁전이 건설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원 세조, 쿠빌라이 칸(忽必烈汗, 1215~1294) 때인 1267년이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大都)의 황궁터가 현재 자금성과 50% 가량 겹치기 때문이다.
영락제의 명으로 원의 궁전터 약간 남쪽에 새로운 궁전을 건립했다. 그러나 명이 멸망할 때, 베이징을 점령한 농민반란군의 수장 이자성에 의해 전역이 전소되고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청 3대 황제인 순치제에 의해 재건된다.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들은 전 왕조의 궁전 자리에 새 궁전을 짓지 않는다. 망한 왕조의 나쁜 기운과 겹치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주족은 신경 쓰지 않고 명이 건설했던 궁전터에 건물만 새로 지었다. 자금성은 1911년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统帝) 푸이(溥仪)까지 491년간 24명의 황제를 거치는 동안 명실상부한 중국의 중심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2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전제군주제도가 폐지되었다. 중화민국 초기, 자금성을 어찌해야 할까는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처음에는 폐위된 선통제가 궁전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4년 황제복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푸이가 톈진의 일본 영사관으로 망명하며 문제는 더 시끄러워졌다. 논쟁 끝에 프랑스가 루브르 궁전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예를 따르기로 했다.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은 금단의 거처에서 고궁박물원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후 자금성은 또 한 번 시련을 겪는다. 문화혁명시기, 마오쩌둥에 의해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 철거 계획이 입안되기에 이른다. 다행히 이 계획은 저우언라이에 의해 백지화되었다. 현재 베이징의 중심에 서 있는 고궁박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 황제에게만 사용이 허락되었던 황금색 유리기와 지붕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외조(外朝)는 자금성의 남쪽 부분으로 오문(午门)에서부터 보화전(宝和殿)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조정의 바깥쪽에 해당하며, 황제가 신하들과 함께 의식이나 축전 등 공식적인 업무를 거행했던 장소이다.
높이 37.95m, 문의 두께만 무려 36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1420년 명 영락제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두 차례나 화재로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현재의 오문(午门)은 1647년 순치제 때 다시 세운 것.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은 새가 날개를 편 듯 'Π' 모양(또는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 데다 새의 머리, 어깨, 날개 끝에 해당하는 자리에 총 5동의 누각이 있어 오봉루(五凤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오문도 천안문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커다란 문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황후가 시집올 때, 과거 급제자 1~3등이 처음 입궐할 때만 특별히 예외를 두어 중앙문으로 출입하게 했다. 중앙문 바로 오른쪽 문은 신하들, 왼쪽 문은 황실 가족들의 전용문이었다.
성벽에는 다섯 개의 누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각각의 용도가 달랐다. 정중앙의 거대한 누각은 역시 황제 전용. 군대 사열식이나 황제의 출병식, 매해 달력을 반포하는 의식 때 황제가 앉았다고 한다. 양 옆의 누각은 종루와 고루로 황제의 출타 및 궁정의 행사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문 앞 광장은 간혹 형벌을 치르는 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죄를 지은 고위관리는 오문 앞에서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입장권 매표소와 물건 보관소, 오디오 가이드기 대여소가 오문 앞에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오문은 고궁박물원의 입구로 이후부터는 입장권이 필요하다.
한백옥석(汉白玉石)으로 만든 우아한 아치형 다리.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오문의 안쪽, 태화문 광장에 있다. 활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인공하천 금수하(金水河)와 빼어난 미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얀 돌로 조성된 하천 바닥에는 5개의 석교가 걸려 있으며 가운데에 있는 다리는 황제가 이용하였다. 금수하는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아주 맑은 물이 흘렀다는데, 지금은 일부 교양 없는 관광객들이 던진 비닐, 생수병들이 간간히 눈에 띄는 시원찮은 물길이 되어버렸다.
금수교(金水桥)를 마주보고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협화문(协和门)과 희화문(熙和门)이 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황실의 물건만을 보관할 수 있는 33개의 크고 작은 건물, 일종의 창고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중 황실 소유의 문서와 그림을 보관했던 문화전(文华殿)과 무영전(武英殿)이 가장 큰 건물에 속한다. 문화전 뒤에 있는 문연각(文渊阁)은 중국 역대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손꼽히는 <사고전서(四库全书)>를 보관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곳 모두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구역이다. 관람객은 금수교를 건너 직진, 태화문으로 향하면 된다.
외조의 실질적인 입구로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문이다. 태화문(太和门)이 처음 지어진 것은 역시 영락제 시절인 1420년이다. 처음 이름은 봉천문(奉天门)이었는데, 이후 명 가정제 때인 1562년에 황극문(皇极门)으로 바뀌었다. 태화문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청 때부터의 일이다. 태화전(太和殿)에서 식전이 거행될 때에는 하급 관리들이 이 문밖에서 황제에게 배례하였다.
역사적으로 소수민족으로서 중국 전역을 통일한 국가는 몽골족이 세운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뿐이었다. 이 중 원이 중국 전역을 지배한 역사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족에 대한 극심한 차별정책으로 반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은 이를 염두에 둔 듯 초기부터 중국 대륙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한족과의 융화에 특히 신경을 썼다. 태화문의 태화(太和)는 '하늘같이 통 크게 모든 민족끼리 화합하자'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 즉 '우리는 점령군 행세 안 할 테니 한족 너희들도 우리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이런 멋진 뜻에도 불구하고 태화문의 운명은 순탄치 않아, 무려 3차례나 화재로 전소되었다. 현재의 태화문은 청나라 말기인 1888년 중건한 것이다. 이 당시 서방으로부터 수많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느라 기진맥진했던 청나라는 과거의 화려함에 반도 못 미치는 수준에서 외형만 유지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태화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는 문 앞에서 위엄을 자랑하는 한 쌍의 청동 사자상이다. 건륭제 시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도 손꼽히는데, 태화문을 마주보고 오른쪽이 수컷, 왼쪽이 암컷이다.
수컷은 천하통일의 상징인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고, 암컷은 드러누운 새끼를 앞발로 꾹 누르고 있는 모습이라 금세 구분된다. 참고로 중국인들은 암사자의 젖이 앞발에 있다고 믿었다. 즉 새끼 사자에게 젖을 먹이는 포즈라는 이야기다. 중국에서 사자는 황제의 권력을 상징했다.
자금성의 정전(正殿)이자 중국 궁전 건축의 자랑스러운 금자탑. 현존하는 목조건물로서는 중국 최대 규모이며, 못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외조의 첫 번째 건물로 황제의 즉위식, 매 10년마다 거행되는 황제의 탄생 축하행사, 황제가 직접 발표하는 조서 반포, 과거 급제자 발표, 음력 설인 춘제(春节)나 동지(冬至节)와 원단(元旦, 음력 정월 초하루) 등의 주요 식전을 치르던 장소이다. 청대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仪)가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최초 건립 연도는 영락제가 수도를 옮긴 1420년. 창건 당시의 이름은 봉청전(奉天殿)이었다. 운 나쁘게도 건립 이듬해인 1421년 벼락에 맞아 전소된 후, 20년이 지난 1441년에야 재건되었다. 이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되며, 다시 전소되기에 이른다. 결국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한 이는 바로 청 순치제. 태화전(太和殿)이라는 이름도 1695년 이때 붙인 것.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테라스를 제외한 전당의 높이만 약 27m, 동서 길이 약 63m에 총면적이 2,377㎡에 이른다. 태화전은 금란전(金銮殿)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금성 내에서도 보화전(保和殿)과 함께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가장 먼저 감상할 부분은 바로 태화전을 받치고 있는 대리석 테라스. 3단의 테라스는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최상급의 높이.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는 1,488개의 기둥과 테라스 하단에 있는 1,142개의 용머리 배수구도 잊지 말고 감상하자.
태화전 안에서는 곧게 뻗은 72개의 초대형 나무기둥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72라는 숫자는 왕조가 영원히 이어진다는 의미. 참고로 고대 중국에서 9는 완전한 숫자로, 8x9인 72는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한다. 이 가운데 황제의 보좌 앞에 배치된 6개의 기둥은 반룡금칠대주(蟠龙金漆大柱)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기둥을 휘감으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금박까지 입혀 고귀함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태화전 내부의 기둥, 서까래, 벽의 장식까지 모든 인테리어에 용이 그려져 있는데, 총 12,654마리의 용이 있다고 한다.
9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는 황제의 옥좌는 4,718개의 금 벽돌을 쌓아 만든 수미단 위에 있다. 수미단 앞에는 7단의 대리석 계단이 황제의 보좌로 연결된다. 황제가 여기 앉아 정무를 볼 때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태화전 밖의 거대한 뜰에서 보고문을 읽기만 했다고. 관리들은 전정(前庭)에 늘어서서 '삼궤구고(三跪九叩)'라는 아홉 번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곳을 나가기 전에 천장의 부조를 눈여겨보자. 두 마리 용이 천장 가운데의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천장의 여의주는 헌원경이라고도 부르는데, 황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보좌에 앉았을 경우 떨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설이 한동안 유력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사실무근이라고.
외조에 있는 3개의 궁전 중 가장 작고, 중요도 또한 떨어진다. 태화전에 비하면 작은 정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담한데, 가로·세로 폭이 각각 16m에 불과한 정사각형 건물이다. 하얀 3층의 기단(基坛) 위에 지어졌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지붕의 모양이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내부에는 옥좌가 놓여 있다.
최초 건조(1420년) 이후 3차례나 화재로 전소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순치제가 다스리던 1645년 재건된 것. 건물의 용도가 왕조에 따라 다른 것이 특징인데, 명대에는 태화전에서 벌어지는 식전과 의식 전에 황제가 머물며 준비하는 휴게실이었다. 청대에 와서는 황제의 개인 접견실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외에 조서 작성이나 선농단(先农坛)에서 벌어지는 농사 장려 의식 때 사용될 도구들을 점검하기도 했고, 10년마다 황족들이 모여 족보 기재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중화전(中和殿)과 관련한 가장 최근의 중대한 사건은 19세기 변법자강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유폐된 사건이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사한 광서제는 중화전과 이화원의 옥란당을 전전하며 10년간이나 구차한 목숨을 이어갔다.
황제가 공식 업무를 보는 공간이 외조라면, 조정 안쪽에 해당되는 내정(內廷)은 황제가 통상적인 업무를 보는 사적인 생활의 장이었다. 내정도 외조와 마찬가지로 3개의 주요 궁전이 줄지어 서 있다. 주요 궁전의 좌우에 있는 동육궁(东六宮)과 서육궁은 황후와 후궁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또 다른 흥미를 자아낸다.
내정의 정문 격으로 이곳부터는 황제 외에는 황후와 궁녀, 환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청대에는 이곳에서 황제의 조배(朝拜)가 이루어졌으며, 정무 보고에 대한 결재도 이곳에서 내려졌다. 황제가 이 문에 나와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하니 기능적으로는 외조에 속한다 하겠다. 특히 청의 전성기를 연 강희제 때에는 남부지방의 반란 진압, 타이완 합병,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 등 굵직굵직한 정책 결정이 이곳에서 내려졌다고 한다.
건청문(乾淸门) 앞에도 청동 사자상 한 쌍이 있다. 그러나 태화문의 사자상과 달리 귀를 닫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가장 유력한 주장은 황제의 처소인 만큼 조용히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정의 핵심 건물로 청나라 초기 황제들의 침전이자 집무실. 또 황제가 임종했을 때에는 장례식 때까지 여기에 관을 안치했다가 이후에 능묘에 매장했다고 한다. 1420년 건조되었으며, 1798년에 청 가경제에 의해 수복되었다. 청대의 강희제까지는 황제가 거주했던 곳으로 침실로도 사용되었다.
18세기 초, 옹정제 이전까지만 해도 건청궁(乾淸宮)에는 27개의 침대가 있었고 매일 밤 침대를 바꿨다는데 이는 암살자가 건청궁에 침입한다 해도 어느 침대에서 황제가 자는지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옹정제 즉위 이후에는 비밀침소인 양심전(养心殿)을 만들고, 이곳을 내정의 전례(典礼)나 외국 사절의 알현 장소로 사용했다. 강희 61년인 1722년과 건륭 50년인 1785년에는 건청궁에서 천수연(千叟宴)이라는 일종의 경로잔치를 열었는데, 전국의 60세 이상 노인 3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였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이런 종류의 황실 잔치는 단 두 번 열렸는데, 그 장소는 모두 건청궁이었다.
건청궁 최대의 볼거리는 궁 안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옥좌 위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한자가 크게 적혀 있는데, 순치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옹정제 이후 황제들은 이 액자 뒤에 황위를 이을 왕자의 이름을 써서 숨겨두곤 했다. 이른바 밀건법(密建法)이라는 제도다. 황제의 사후 왕자들의 황위계승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족 국가인 청은 한족 황실처럼 큰아들이 자동으로 황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가장 똑똑한 왕자가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뚜렷하게 앞서나가는 왕자가 없는 경우 형제끼리 치고받는 골육상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황제는 생전에 후계자 지정 문서를 2부 작성해 1부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사망한 후, 편액과 황제의 몸에 있던 문서를 꺼내 동일 인물이 적혀 있을 경우 그가 황위를 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밀건법이 시행된 후 이 법이 쓸데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옹정제 이후 청의 전성기는 끝이 나고 이후 황제들은 외아들만 두었거나 후사가 없어 밀건법과 상관없이 태후 등 황실 어른들에 의해 후계 황제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천정에는 남색과 녹색 바탕에 금으로 용과 봉황을 그린 의장(意匠)을 볼 수 있다.
외조의 중화전을 꼭 빼닮은 궁전으로 크기만 좀 더 작다. 명대에는 황후의 침실로 사용되었으며, 청대에는 황후의 공식 업무기관이었다. 1420년 최초로 건립, 1798년 가경제 때 재건되었다. 황후의 공식 업무는 나라의 국모로서 길쌈이나 누에치기 같은 여성 고유의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었는데 동지나 원단, 황후의 생일 등 때 신하들의 축하를 받는 것도 황후의 주요한 의무였다.
건륭 13년인 1748년 이후부터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옥새(옥으로 된 도장)들을 교태전(交泰殿)에 안치했다. 옥새'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옥새의 종류가 무려 25가지나 되었기 때문. 문서의 종류와 격에 따라 각각 다른 옥새를 찍었다. 건륭제는 청 황실이 25대에 이르도록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5개의 옥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청은 건륭제 이후 6명, 총 10명의 황제에서 그치고 만다.
교태전의 금빛 찬란한 천장은 규모는 작지만 화려함만큼은 여타 다른 궁전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황제)과 황후의 상징인 봉황이 뒤엉켜 있는데, 황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후의 보좌 뒤에 있는 '무위(無爲)'라고 쓰인 편액은 얼핏 보면 도교의 가르침으로 볼 수도 있으나 황후와 외척세력들에게 '자연과 사회의 흐름에 쓸데없이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로도 해석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의해 결국 망국까지 갔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교태전 앞, 동쪽 전각에는 1745년에 제작된 물시계인 '동호적루(铜壺適漏)'가, 서쪽 전각에는 1789년에 제작된 서양식 시계인 '대장명종(大自鸣钟)'이 있다. 둘 다 높이가 5m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눈여겨볼 만하다.
1417년 만들어진 고궁 최대의 정원. 역대 황제들과 황후, 후궁, 황세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궁후원(宮后园)이라고도 불렸다. 자금성 안에서 유일하게 나무를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160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어화원(御花园)의 총면적은 약 1,700㎡.
자금성 내의 다른 곳에 비하면 아주 단출하지만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나무들과 중국 전역에서 모아온 진기한 수석들이 많아 방문할 가치는 충분하다. 가장 인상적인 볼거리는 퇴수산(堆秀山). 거대한 태호석(太湖石)으로 만든 인공산으로, 정상(?)에는 작은 정자도 있다. 중양절 때는 황제가 가족들과 이 산에 올라 궁 밖의 풍경과 달을 감상했다고 한다.
어화원을 제외한 자금성의 모든 구역에서 풀 한 포기 구경하기 힘든 것은 보안상의 이유에서였다. 즉 나무에 숨어서 자객이 잠입할 것을 우려해 행여 자금성이 침입을 받았을 경우 화살을 날릴 시야를 확보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자금성의 북문. 오문과 함께 자금성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입구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1420년 창건 당시의 이름은 현무문(玄武门)이었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 재건하며 신무문(神武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무문으로 들어갈 경우, 관람 순서가 역순이 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오문으로 입장할 것을 권한다.
'北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毛主席纪念堂 (0) | 2017.04.07 |
|---|---|
| 大山子 798 艺术区 (0) | 2017.02.15 |
| 天安门 (0) | 2017.02.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