Þingvellir
35번 국도를 타고 셀포스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최초 정착민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잉골프스퍄틀(Ingólfsfjall)이 나온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싱벨리어 국립공원(Þingvellir National Park)을 만날 수 있다.
레이캬비크에서 바로 접근 가능하며, 아이슬란드 역사의 심장부이기도 한 싱벨리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자연과 중세 북유럽 문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2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싱그바들라바튼(Þingvallavatn)의 북쪽으로 역사적인 장소가 펼쳐져 있다. 용암지대인 싱벨리어는 여름에는 야생화로,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로 물든다.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아이슬란드를 두 쪽으로 가르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항공사진 상으로는 깊은 균열의 알만나가우(Almannagjá)와 그 측면에서 열렸던 알싱기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평원을 북동쪽으로 가로지르는 어마어마한 열구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따금 지진으로 그 형태가 변하기도 하였는데, 1789년 지진으로 평원지대가 1미터 가량 가라앉게 되었다. 두 판은 매년 약 2cm씩 벌어진다고 한다.
대지가 벌어진 틈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는 강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오래전 덴마크 왕이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빈 후, '소원을 비는 샘'이라는 동전들이 가득한 웅덩이도 생겨났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초기 정착민들이 930년 연방을 결성하고자 했을 때, 세계 최초의 의회 알싱기(AlÞingi)가 열릴 장소로 선택한 곳이 "국회 평원"이라는 뜻의 싱벨리어였다. 이는 당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이루었던 엄격한 중세 왕조와 비교할 때 "공화주의"라는 큰 실험을 한 것이었다.
10세기 아이슬란드의 수장들은 한 사람의 지배자만을 인정하는 전통적 권위 형태에 안주하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들은 각자의 지역(Þings)을 지배하고 스스로를 "신"이라는 의미의 고다르(goðar)라고 불렀다. 법률 의장이 주도한 알싱기는 특정 문제에 있어서는 중앙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법적 분쟁이나 법 제정의 문제는 의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뢰그레타(Lögrétta)라는 법률위원회에 의해 조정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수장들과 투표권을 갖지 않는 자문단으로 구성되었다. 더 작은 사건들은 아이슬란드의 각 "쿼터"별 법정에서 다루어졌으며, 이는 36명의 수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알싱기는 매년 2주간 싱벨리어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지리적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의 중간지점이었던 데다 천연 원형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연례적으로 이루어진 모임은 독특한 문화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에 지방 사투리가 없는 원인을 설명해준다.
알싱기는 군사력을 일으키거나 경찰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법률 의장의 권력을 제한해두었기에 그 지위를 왕조로 향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없었다. 예컨대 한 수장이 법률 의장과 반목하여 1,500여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나타난다 해도 법률 의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따라서 알싱기는 일을 진척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12년, 한 소송인은 법의 세부조항을 이유로 자신의 사건을 어물쩍 넘기려 한다는 의심이 들자 자신의 사병을 풀어버린 사례도 있다. 이로 인해 소송절차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싱벨리어 평원은 온통 시체로 뒤덮였다. 소송은 넘쳐났지만 법은 너무 복잡했고 사회는 깊은 난제에 빠졌다. 법정에서의 정당한 절차는 항상 칼날 위에 놓인 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