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国临时政府
1919년에 발생한 3.1운동은 그간 흩어져 있던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단결해야 독립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영감을 주었다.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우익인사 이승만부터 고려 공산당의 대표였던 이동휘까지 좌우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세력은 1919년 4월 10일 중국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3.1운동 발생 시점으로부터 겨우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상하이는 이미 3.1운동 이전부터 간도 지방과 함께 중국 내 항일 독립운동의 전초 기지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가까운 사이였고, 영국과 라이벌 관계였던 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한제국 출신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는 한동안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다가 조계지 바깥의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중화민국 정부는 상하이에서 지척인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으니 여차하면 난징으로 피신하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당시 상하이는 아시아의 중심으로 전 세계의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다. 자연스레 상하이는 항일 투쟁의 중심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거점으로 설립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까지 중국과 적대 국가였기에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터에 손이 미치지 못했고, 북한은 임시정부를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상하이의 임시정부 건물은 잊혀졌다.
이 터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1988년 한·중 간의 공동 추적 덕분이다. 양국 정부는 임시정부 터를 찾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지만, 막상 그곳에 살던 사람은 자신의 집이 어떤 건물인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는 꽤 알려진 사실을 양국 정부만 몰랐던 셈이다.
1989년 3.1절 특집으로 한국의 동아일보가 폐가처럼 방치된 임시정부 터에 대해서 보존을 촉구하는 기사를 썼고, 때마침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어 한국의 삼성물산이 30만 달러를 쾌척, 임시정부 복원에 나섰다. 1993년 그리고 2002년과 2015년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거쳐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우리 앞에 서 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 일대는 상하이에서 가장 핫한 지역 중 하나다. 어떻게 보면 우리 때문에 이 일대 사람들만 일종의 개발제한구역에 묶여서 사는 셈이다. 최근 상하이시는 일대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건물 1층에 한해 상업시설로 개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관람은 1층의 시청각실에서 임시정부의 활약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시청한 후에 이루어진다. 건물 뒤로 돌아가면 본격적인 전시실이 시작된다. 1층에는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함께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가 걸려 있다. 2층의 주요 볼거리는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과 각 부처 장관의 집무실이다. 한 국가의 임시정부 거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곳. 집무실과 침실이 붙어 있는 옹색한 방이다. 3층은 임시정부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외교부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휴즈에게 보낸 독립승인요구서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외교적 분쟁에 처할 때 공정한 중재를 약속했던 미국이 을사보호조약 이후 가장 먼저 조선을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시의 외교적 노력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였던 셈. 결국 임시정부가 선택한 길은 무장 투쟁이었다. 전시관 안에는 이외에도 당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