豫园
명·청대의 대표적인 강남 정원으로 쑤저우의 4대 정원과 함께 강남명원(江南名园)으로 손꼽힌다. 1559년 명나라의 관료였던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 반은(潘恩)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18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현재의 예원상성까지 아우르는 5만㎡의 어마어마한 정원이었다고. 당시 중국 제일의 정원 설계자인 장남양(张南阳)이 설계한 예원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까지 건설된 중국정원의 모든 장점을 아우르는 것.
하지만 정원으로서 예원이 누린 영화는 생각보다 짧았다. 예원의 주인인 반 씨 집안은 반윤단 사후 급속히 몰락했고, 결국 예원 옆 사당인 성황묘의 일부처럼 쓰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19세기에는 영국군의 침략으로 값나가는 모든 물건을 약탈당해 껍데기뿐인 명소가 되고 말았다.
특히 1864년은 예원이 잠시 지도상에서 사라진 날로 기억된다. 약 14년간 중국 남부를 뒤흔들며 2천만 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태평천국이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의 상하이 기지였던 예원은 물밀듯이 밀려든 청나라 관군에 의해 깨끗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예원이 오늘날과 같이 비교적 정돈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48년 건국한 현재의 중국 정부 덕분이다. 중국 정부는 1956년 예원에 대한 대대적인 복구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미 어디부터가 예원 부지였는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40% 정도에 해당하는 2만㎡만을 복구하게 되었다. 1961년 9월 30일 국경절을 하루 앞둔 날 예원은 다시 상하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사자성어인 점입가경(漸入佳境)을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테라스식 회랑이다. 지날수록 재미가 좋다는 뜻의 점입가경이란 말처럼 회랑을 지나며 인공호수와 대가산, 그리고 앙산당의 웅장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점입가경의 입구에 있는 한 쌍의 사자상은 원나라 시절인 1290년 제조된 것들이다. 구슬에 앞발을 얹은 놈이 수놈이고, 새끼를 얹은 놈이 암놈이다. 예전 중국 사람들은 사자의 젖이 앞발에 있다고 믿었다. 즉, 새끼를 앞발로 덮은 이유는 젖을 먹이는 중이라는 이야기다.